예수께서 갈릴리를 떠나서 유대 지경으로 가신 것은 어딘가를 향한 움직임이기는 하지만 그 유대 지경의 의미를 살피는 것도 중요합니다. 유대 지경의 사람들의 삶의 의식과 행동에 대한 예수의 치유 사역이 그곳에서 벌어진 것입니다. 1.유대 지경에서 사는 사람들의 일반적 상황은 이런 특징이 있습니다. 이들은 분리주의의 특징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주변지역에 살고 있는 이들은 중앙이 아닌 주변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못하기도 하고, 들어가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주류사회에 끼이지 못하는데 대한 소외감이 있으며, 그것이 한이 되어 남을 비난하고 공격을 잘 합니다. 이들은 독선적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유대 광야 사람들에게는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은 너무 형식화되어 있는..
이 세상에 오신 예수는 분명한 비전과 꿈이 있었고, 그것을 이루시기 위해 제자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즉 예수는 형제를 용서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런 삶이 결국 주의 뜻을 이루어가는 삶이 됩니다. 1.예수께서 바라보시는 이 세상의 상황은 이렇습니다. 빚을 갚을 길 없는 무력(無力)함이 있습니다. 일만 달란트라는 금액은 어떤 한 사람이 갚을 수 있는 능력의 범위를 벗어난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그 탕감 받은 빚의 은혜의 크기를 말하는 동시에 그 빚을 결코 갚을 수 없는 사람들의 무력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죄와 사망의 문제에 대해 사람은 무력한 존재입니다. 받은 은혜를 모르는 무지(無知)가 있습니다.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은 사람은 다시 살아난 기쁨은 있지만 그 은혜를 찬양하고 감사하는 일은 없었..
베드로가 형제의 죄를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할 때 예수는 베드로의 생각을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숫자상의 몇 번의 용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중심의 용서가 필요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영의 생각이 있어야 합니다. 1.베드로의 생각은 형제의 죄를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하는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버려지지 않는 자기생각의 찌끼가 그대로 있음을 보여줍니다. 베드로는 주의 말씀을 들을 때 있는 그대로 아멘으로 받고 끝내지 않습니다. 말씀을 들으면서도 자기의 생각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나의 생각이 주의 말씀에 완전히 굴복하지 않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생각은 숫자에 매여 있는 생각입니다. 베드로는 숫자를 말하며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나은 삶을 말합니다. “일곱 번까지 하리이까?라는 질문은 당시 ..
잘 사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바르게 사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천국에서는 누가 큰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예수는 결론적으로 이 땅에 세워지는 교회가 어떤 교회가 되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시고 있습니다. 1.예수께서 세우시고자 하시는 교회는 이런 교회입니다. 사랑과 거룩함이 조화된 교회를 주님은 꿈꾸십니다. 교회는 한 영혼도 쉽게 버리지 않으려고 애를 써야 하지만 동시에 거룩함을 무너뜨려서도 안 됩니다. 계시록2장의 에베소교회는 거룩함을 지켰으나 사랑을 잃었고, 두아디라교회는 사랑 때문에 음란한 이세벨을 용납했습니다. 사랑과 거룩함은 교회에 필요한 두 날개입니다. 하늘의 권세를 가진 교회를 주님은 꿈꾸십니다. 예수는 교회가 이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라고 말씀..
“천국에서 누가 큰 자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어린아이 같은 작은 자 한 사람을 업신여겨서 그로 하여금 길을 잃지 말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입니다. 1.사람들 중에는 길 잃은 양과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길 잃은 양이란 무리 중에서 업신여김을 당하여 밀려난 사람입니다. 눅15:에서 길 잃은 양 한 마리의 비유도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하시는 예수에게 불평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양이 길을 잃게 되는 것은 무리들이 그와 함께 하지 않으므로 그 무리에서 밀려난 양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길 잃은 양은 아주 위험한 지경에 빠지게 됩니다. 길을 잃은 양은 자기 몸을 스스로 지킬 수 있는 맹수가 아닙니다. 다른 힘이 있는 자들에게 공격의 대상이고, 맹수들의 먹잇..
사고를 당하여 한쪽 손이나 다리가 없어져도 그 사람의 인격, 그 사람의 존재 자체가 잘려간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육체에 관심을 가지고 자기 몸을 아끼고 있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1.잘못된 가치관의 사람은 육체로 사는 사람입니다. 육체에 이끌리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그의 손과 발 또는 그의 눈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합니다. 자기의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손과 발, 그리고 눈이 저절로 움직여 그 사람을 죄를 짓게 하는 것입니다. 그의 육체가 이끄는 데로 사는 사람인 것입니다. 성령의 이끄심으로 움직이지는 않는 사람입니다. 자기 육체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예수는 차라리 불구가 되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온전한 몸으로 지옥에 가는 것보다 훨씬 낫다..
미래에 대한 불안은 현재에 돌출적인 행동을 취하고, 미래에 대한 소망과 확신이 있는 사람은 현재의 삶에서 담대함이나 평안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 땅을 볼 때 천국의 시각, 하나님의 시각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1.제자들은 천국에서 누가 큰 자인가라고 질문했습니다. 이것은 땅의 시각으로 천국을 바라보는 일입니다. 제자들은 천국에 대해 질문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천국에 대해 말하지만 이 땅의 시각으로 보고 말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천국에서 누가 큰가에 대한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천국에서도 큰 자와 작은 자가 있어서 서로 위계질서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크고자 하는 욕망으로 하는 질문입니다. 예수의 제자들이 가지 있는 마음은 큰 자가 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생각하는 큰 자는..
예수님은 다시 그의 고난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을 듣고 두려워하고 근심할 뿐입니다. 예수의 길과 제자들의 길은 여전히 평행선을 그리고 있을 뿐입니다. 주의 길과 나의 길은 평행선이 아니라 일치가 되어야 합니다. 1.예수는 계속 십자가의 길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예수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알고 그 뜻에 분명한 헌신을 합니다. 예수는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통한 인간의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을 받아들이셨으며, 그 사실에 대해 조금도 흔들림이 없습니다. 아들로서 아버지의 뜻을 이해하고 희생과 헌신의 길에 순종하는 삶의 자세를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예수는 그의 삶에서 흔들림이 없습니다. 변화산의 영광과 산 아래에서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고 능력이 나타남으로 사람들이 하나님의 위엄..
아이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가지고 있는 아버지라고 해도 그 아들을 위해 모든 것을 다 해 줄 수는 없습니다. 귀신들린 아이를 둔 아버지는 제자들에게 왔다가 실망하고 있었는데 다시 예수께 믿음을 구하여 그 믿음으로 아들의 문제를 해결합니다. 1.믿음의 아버지가 되어야 합니다. 아버지의 문제는 귀신의 지배로 고통을 당하는 아이를 보고만 있을 뿐이지 그를 고쳐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귀신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사람에게 들어가서 그를 지배하고 괴롭힙니다. 벙어리귀신은 아이에게 들어가서 아이로 하여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하고, 거꾸러지고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파리해 가도록 만들었습니다. 믿음이 없는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기는 하지만 그의 사랑을 드러낼 힘과 능력이 없습니다. 이 아버지는 자기의 무능함에..
생존의 문제가 해결된 사람은 영광스러워지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참된 영광을 모르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가장 가까운 제자 3명을 산 위로 초청하여 그의 영광을 보여주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그 영광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셨습니까? 1.제자들은 주의 영광을 보기는 하지만 누릴 줄은 몰랐습니다. 영광의 자리에 초청받았으나 졸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졸고 있다는 것은 그 자리의 중요성을 모르는 것이며, 앞으로 이루어질 사건에 대한 어떤 기대감이나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은혜의 자리에서 믿음을 보이지 못하는 것이 졸고 자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광경을 목격하는 사람들이지만 곤하여 졸고 있었습니다. 영광의 자리에 초청받았으나 구경꾼에 머물러 있습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제자는 열두 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