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은 빨리 그치고 평화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영적 전쟁은 그치지 않고 계속되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그 말씀을 듣는 유대인들에게는 바로 영적 전쟁이 되었습니다. 예수의 말씀은 예수를 대적하는 무리들이 서로 분쟁하도록 흔들어 놓은 무기가 되었습니다. 1.유대인들은 예수의 말씀 때문에 서로 분쟁하게 되었습니다. 기존의 전통과 율법에 매여 있어서 예수의 말씀을 들어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이 사람들은 예수를 영접하거나 그들의 구세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예수를 향한 믿음이 없는 이 사람들은 생명의 기회를 잃어버린 사람들입니다.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예수를 향해 믿음의 문을 열지 않습니다. 사단의 진에 속한 자들은 아주 특별하게..
예레미야는 자기 백성들의 죄와 그로 인한 멸망의 상태를 예고하면서 그들을 위하여 우는 자가 되었다. 1절에서 예레미야는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그렇게 되면 살륙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곡읍하리로다"라고 말한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살륙당한 딸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아타까운 마음을 그렇게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유다의 멸망을 바라보는 안타까운 마음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유대 백성들 자신들은 자신들의 문제에 대해서도 전혀 그런 마음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 그들의 삶을 보면 한 마디로 거짓의 삶을 살고 있다. 3절에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그들이 활을 당김같이 그 혀를 놀려 거짓을 말하며 그들이 이 땅에서 강성하나 진실하지 아니하고 악에서 악으로..
경제적으로 힘들 때 사람들은 취업의 문, 경제 회복의 문이 잘 열리기를 바랍니다. 그렇지만 예수는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예수가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진정한 문입니다. 이 문을 출입하고, 이 문을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1.양에게 왜 문이 필요합니까? 양에게 문이 없으면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하루 종일 밖에서 활동했던 양들은 양의 문을 통하여 우리에 들어가서 쉼을 얻습니다. 양이 쉼을 얻지 못하면 양은 쓰러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세상에서 쉼을 필요로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진정한 안식이 사람들에게는 필요합니다. 이것을 위해 양의 문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양의 문이 없으면 양이 나아가지 못합니다. 양이 우리에서 잠만 자서는 의미가 없습니다. 밖으로 나아가서 풀을 뜯으며..
실로암에서 눈을 뜬 사람에게 믿음을 요구하신 예수는 아직 영적 눈을 뜨지 못하고 있는 바리새인들과 예수의 제자들 앞에서 자신이 양의 목자라는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양의 목자이신 예수 앞에서 양으로서 사는 것은 참 된 복입니다. 1.예수는 자신을 양의 목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양의 우리에 있는 문으로 들어가는 주권이 있는 사람입니다.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들어가는 사람은 절도, 강도이지만,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진정한 목자입니다. 양의 목자는 그의 양떼들에게로 들어갈 수 있는 주권이 있으며, 자기의 주권을 잘 사용하는 사람입니다. 문지기가 알아보며 문을 열어주는 사람입니다. 문지기는 목자가 양을 이끌고 나가도록 밤새 양의 우리를 지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사역의 ..
예수는 열두 제자가 있지만 다시 그가 가시기를 원하셨던 곳으로 70명의 사람을 보내셨습니다. 70인의 사람을 보내시는 예수의 사역의 목적과 방법은 지금 우리가 보냄을 받은 곳에서,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그 일을 잘 감당하는 근거가 됩니다. 1.예수는 70명의 사람을 세워 보내셨습니다. 예수의 비전은 각 동, 각 처에서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것입니다. 예수는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이 창조주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을 알고 그 하나님의 통치하에서 복을 누리기를 꿈꾸고 계셨습니다.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예수는 모든 족속들이 사는 곳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비전을 잃지 않았습니다. 예수의 관심은 영혼의 추수에 있습니다. 예수는 추수하는 주인과 또 추수할 일이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는 많..
세상에서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가장 가치 있고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예수를 따르는 일에서는 몇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예수를 따르는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지금 현 시대에서도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일입니다. 1.예수를 따를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속적인 목적을 가진 사람은 예수를 따르지 못합니다. 첫 번째 사람은 스스로 예수를 따르기를 원했지만 그가 따라야 할 예수가 십자가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를 따름으로서 오는 고난과 어려움에 대한 생각이 없이 단지 예수의 능력만 좋아한 것입니다. 삶의 우선순위가 잘못되면 예수를 따를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부르신 두 번째 사람은 먼저 부친을 장사하게 하라고 말하며 그 부르심을 완곡하게 거절합니다. 이 사람은 예수의 부르..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예수는 사마리아 사람들이 그 사역에 일부분 동참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를 환대하지 못하고 거부함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일에 동참할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렸습니다. 1.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를 거부했습니다. 이들은 예루살렘 사람들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도 예수를 알고 인정하기는 하지만 그가 예루살렘으로 간다는 것 때문에 거부한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에게는 예루살렘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생긴 상처와 열등감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대인들과 서로 상종치 않았습니다.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사람에 대해서도 거부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에 대한 분노를 예루살렘으로 가는 사람들에게까지 확장시킨 것..
예수께서 갈릴리를 떠나서 유대 지경으로 가신 것은 어딘가를 향한 움직임이기는 하지만 그 유대 지경의 의미를 살피는 것도 중요합니다. 유대 지경의 사람들의 삶의 의식과 행동에 대한 예수의 치유 사역이 그곳에서 벌어진 것입니다. 1.유대 지경에서 사는 사람들의 일반적 상황은 이런 특징이 있습니다. 이들은 분리주의의 특징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주변지역에 살고 있는 이들은 중앙이 아닌 주변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못하기도 하고, 들어가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주류사회에 끼이지 못하는데 대한 소외감이 있으며, 그것이 한이 되어 남을 비난하고 공격을 잘 합니다. 이들은 독선적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유대 광야 사람들에게는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은 너무 형식화되어 있는..
이 세상에 오신 예수는 분명한 비전과 꿈이 있었고, 그것을 이루시기 위해 제자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즉 예수는 형제를 용서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런 삶이 결국 주의 뜻을 이루어가는 삶이 됩니다. 1.예수께서 바라보시는 이 세상의 상황은 이렇습니다. 빚을 갚을 길 없는 무력(無力)함이 있습니다. 일만 달란트라는 금액은 어떤 한 사람이 갚을 수 있는 능력의 범위를 벗어난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그 탕감 받은 빚의 은혜의 크기를 말하는 동시에 그 빚을 결코 갚을 수 없는 사람들의 무력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죄와 사망의 문제에 대해 사람은 무력한 존재입니다. 받은 은혜를 모르는 무지(無知)가 있습니다.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은 사람은 다시 살아난 기쁨은 있지만 그 은혜를 찬양하고 감사하는 일은 없었..
베드로가 형제의 죄를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할 때 예수는 베드로의 생각을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숫자상의 몇 번의 용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중심의 용서가 필요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영의 생각이 있어야 합니다. 1.베드로의 생각은 형제의 죄를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하는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버려지지 않는 자기생각의 찌끼가 그대로 있음을 보여줍니다. 베드로는 주의 말씀을 들을 때 있는 그대로 아멘으로 받고 끝내지 않습니다. 말씀을 들으면서도 자기의 생각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나의 생각이 주의 말씀에 완전히 굴복하지 않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생각은 숫자에 매여 있는 생각입니다. 베드로는 숫자를 말하며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나은 삶을 말합니다. “일곱 번까지 하리이까?라는 질문은 당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