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23:47-49
사탄은 사람들이 원하는 먹음직, 보암직,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며 유혹하지만 하나님은 그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는 죽음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이것을 믿음의 눈으로 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1.십자가에서 죽는 예수를 보는 시각은 각각 달랐습니다.
백부장은 예수의 죽음을 깊이 있게 보는 시각이었습니다. “호라오”(όράω)라는 단어는 직시했다는 의미입니다. 깨달음이 있는 시각입니다.(롬15:21) 처음에는 단순한 사형수로만 보았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의미를 가지고 보았으며, 예수의 죽음과 동시에 일어난 지진과 바위의 터짐을 보고 예수가 누군지 깨닫게 되었습니다.(막15:39)
구경하던 자들은 단지 보았을 뿐이었습니다. 이들이 본 것은 구경했다는 것입니다. “데오레오”(θεωρεω)란 단어는 눈으로 보지만 그 의미를 얻거나 깨달음을 얻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단지 자기들의 잘못에 대한 후회가 나타날 뿐이었습니다. 가슴을 치며 돌아가기는 하지만 그 죽음으로 무엇이 이루어지는지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왔던 여자들은 십자가의 예수를 멀리서 보았습니다. 역시 ‘호라오’(όράω)라는 단어입니다. 예수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으로 보았습니다.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예수의 무덤을 찾는 일은 숨어있던 제자들이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죽음을 쳐다본 여자들이 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본 자가 예수를 위하여 할 일을 알게 됩니다.
2.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예수를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죄의 결과로 오는 죽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드러난 일은 죄의 결과로 나타난 죽음이었습니다.(롬6:23)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죽음의 모습, 특히 저주받은 죽음을 보여주셨습니다.(갈3:13) 사람들은 죽음을 회피하려고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죄의 결과인 죽음을 직시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평범하지 않은 죽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십자가의 세 종류의 죽음은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 사이에 구원자로의 모습이었습니다. 죽음이라고 해도 모두 똑 같은 죽음이 아닙니다. 아담이 죽는 당시에 에녹을 불러올리심으로 당대의 사람들에게 죽음의 두 가지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창5:24)
죽음의 사건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드러난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은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는 표징의 현상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내가 여기 있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순절 사도들에게 임하신 성령의 표징도 마찬가지입니다.(행2:2-3)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이 더욱 복이 있습니다.
3.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것을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선입견이 없어야 합니다. 상황을 직시(호라오)해야 합니다. 예수의 죽음에 대해 대제사장이 “이 사람은 정녕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고백해야 정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고백은 이방인 백부장의 고백이었습니다. 백부장은 예수께 대한 선입견이 없었습니다. 선입견이 있으면 하나님이 보게 하시는 것을 볼 수 없습니다.
영적 눈이 열려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문자로만 보고, 하나님의 의도를 보지 못했습니다. 표적의 현상이 아니라 의도를 읽어야 합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든 표적의 의도는 제자들이 예수를 믿도록 하는데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아그립바 왕에게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해야 하는 자기의 사명을 설명했습니다.(행26:18)
나의 사역을 발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보이신 것을 영적인 시각으로 보면 하나님의 의도를 알게 되고, 이것의 결과는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를 본 후 자기의 일을 깨달았습니다.(딤전1:16)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을 본 것이 있는 사람은 자기의 할 일을 알고, 그 일에 힘을 다하게 됩니다.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에서 아들까지 내어 놓으신 하나님의 희생과 사랑을 믿음의 눈으로 보는 사람이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역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